백산안희제 생가

백산안희제 생가

백산안희제 생가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관리 문화관광과
연락처 055-570-2530
주차시설 가능
장애인 편의시설 없음

백산 안희제 선생은 1885년 부림면 입산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창남학교를 창설하고 1908년 의신학교를 창설, 1909년 동래 구명학교 건립, 대구 교남학교 건립 등으로 신학문 보급에 힘썼다. 27세 때 만주에서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소련으로 망명하여 독립순보를 간행하였으며, 30세에 부산에서 백상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자본금을 마련하였고, 기미육영회를 조직하고 1926년 언론창달을 위해 시대일보를 인수하였다. 1942년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1943년에는 만주 대종교단 사건으로 구금되었다가 출옥 4시간만인 1943년 9월 2일에 사망하였다.

백산 안희제 선생의 생가는 목조와가인 안채와 초가지붕인 사랑채 2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 가옥은 조선 후기의 민가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으로 독립운동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1993년 1월 8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안채와 사랑채·부속사 등 2동으로 구성된 일반적인 농가주택이다.

안채는 정면 6칸 팔작지붕집으로 앞뒤 툇간이 발달하여 길어진 측면의 길이와 조화를 이룬다. 실내는 왼쪽에서부터 마루, 방, 대청 2칸, 방, 부엌의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동향으로 있어 남측면이 남향으로 1칸 마루가 사랑의 역할을 한다. 평면도 전후 툇간이 발달하여 겹집 형식으로 발전하여 기능이 다양한 방이 필요하지만 별동(別棟)을 만들지 않고 한 건물 안에서 처리한 조선 후기 주택의 특징을 보인다. 사랑채는 안채 정면에 안채와 같이 동향으로 배치하여 대지가 좁지 않은데도 안채와 바짝 붙어 있다. 정면 4칸의 전후 툇간으로 구성된 3량 초가집으로 안채처럼 남측면에 마루를 두었다.

안희제는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의 속칭 설뫼마을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에 헌신한 민족지도자이다. 민족교육과 민족언론 육성에도 선구적 역할을 하였고 만주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하다 광복 2년 전에 일생을 마쳤다. 부림면에 선생의 묘가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안희제(安熙濟, 1885. 8. 4∼1943. 8. 3)는 본관이 강진(康津 혹은 탐진), 호는 백산白山이다. 안기종安起宗의 후손이다. 안기종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의 휘하에서 전공을 세웠다. 안희제는 1885년 8월 4일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부친 안발安鏺과 모친 창녕 성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살 때부터 향리에서 집안의 형인 안익제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 조국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조선의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켜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한일의정서, 한일협약을 강제하여 내정간섭을 본격화하다가 드디어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다. 조국이 망국의 위기에 처하자 안희제는 신학문을 익힐 뜻을 밝혔다.

“국가가 망해 가는데 선비가 어디에 쓰일 것입니까. 고서古書를 읽고 실행하지 않으면 도리어 무식자만 같지 못합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학문은 오히려 나라를 해치는 것이니, 내일 당장 경성으로 올라가 세상에 맞는 학문을 하여 국민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공맹孔孟의 도라 할 수 있는데, 어찌 산림山林에 숨어서 부질없이 글귀만 읽고 있겠습니까”

그는 1905년 21세에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하였다가 다음 해 양정의숙養正義塾으로 전학하여 23세에 졸업하였다.

1907년 동래의 구포에 구명학교와 의령군 의령면에 의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에 창남학교를 창설하였다.

1909년 윤세복·서상일·신성모·남형우·박중화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해 국권 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며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였다.

1914년 부산에서 백산상회白山商會를 경영해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국내외 독립운동단체의 연락처를 제공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해서 각지에 배포, 군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그 해에 백산상회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 개편해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조달기관으로 활동하게 하였다. 11월에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해 다수의 애국청년 학생들을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까지 유학시켰으며, 이러한 장학생들 중에서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1925년에는 운영난에 빠진 중외일보를 인수해 중앙일보로 개칭하고 사장이 되어 일본의 총독정치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1927년 이시목 등과 자력사自力社를 조직해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 뒤 다시 만주로 건너가 1931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다.

1933년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에 발해농장을 세워 착취당하고 있던 한국인 소작농 300여 호를 유치해 토지를 분배해주고 5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자작농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발해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을 실시해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대종교를 신봉해 총본사 전강·교적 간행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42년 11월 일제가 대종교를 독립운동 조직으로 간주해 만주와 국내에서 윤세복 이하 대종교 지도자 21명을 일 거에 체포한 임오교변사건이 일어났을 때 투옥되었다. 이에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9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듬해 목단강병원에서 순국하였다.


* 지정 번호 : 도지정 기념물 제193호

항일애국지사인 백산 안희제선생이 태어나서 자란 집으로 안채와 집사실의 2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목조기와 및 슬래트로 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 구조이고 집사실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 구조이다. 이들 가옥은 조선 후기 민가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다. 뒷산에는 백산선생이 학문을 닦았던 고산제가 남아 있으며, 백산 생가는 후세인들의 산교육장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의령 9경 잇다'라는 저희 천율이 지역 명소를 활용하여 기획한 

공연으로, 의령의 문화가 곁든 여러 명소들에서 함께 어우러진 

천율을 보여주고자 합니다.